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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제사, 가인의 제사

창세기 3장의 타락을 경험하고, 4장에 들어선다.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다. 물론 가인이 첫 번째 아들이고 아벨이 둘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염두에 둔 가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가인은 다른 사람이 날 죽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다. 그걸 보면 이미 다른 사람들, 아담과 하와의 다른 자손들이 땅에 퍼져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않으니까. 4장에서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가인과 그의 죄와 결과이다. 그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그런데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의 아들 이름이 에녹이고, 이것은 시작을 의미하며, 성을 쌓는다는 것은 다분히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이것을 통해 성경은 하나님 없이 삶이 죄의 결과임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에 엄청난 죄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무시 못할 주제가 제사-예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이 문제가 형제 살해까지 이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가인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한다. 선을 행하라고, 죄를 이기라고. 그는 그것에 실패한다. 그에게는 그것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은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어떤 분들은 아벨의 제사가 동물의 피로 드리는 제사이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나름 근거도 있고 일리도 있는데, 이 본문에서는 훨씬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사실 주님 앞에서 동물 제사이건 아니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그랬다면 가인에게 왜 양이나 소를 바치지 않았냐고 물으셔야 하는데, 성경에 그런 기록은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사, 가인과 그의 제사라고 사람과 제사를 함께 받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즉 제물도 중요하지만, 그 앞에 나오는 사람, 제물을 가져온 드리는 사람의 삶과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아벨의 삶은 받으실만하고, 가인의 삶은 그러지 못했다는 거다. 사실 그게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삶이 예배라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맞다. 가인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순종, 즉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이다. 아벨을 죽이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의 그의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잘못했다, 용서해 주십사 말하지 않는다. 내가 받을 벌이 무겁다 말한다. 벌은 받는 중에도 그는 자기 걱정 뿐이다. 누군가 나를 만나면 날 죽이겠다고 말한다. 결코 잘못을 회개한 자의 태도가 아니지 않은가? 동생을 죽이고도 비겁하게 자기의 목숨은 구걸한다. 그는 시기심이 눈이 멀었고, 그 근원에는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그의 삶을 좀 먹고 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창세기 4장은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이기적인지 보여준다. 맞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할 수 없다. 이기적인 존재니까. 하나님 없이도 살 수있다 믿는 존재이니까. 

 

주님, 여기서 주님께 고백합니다. 내힘으로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오직 주님만 우리를 죄와 욕심에서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