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시험하는 하나님 vs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창세기를 읽다 이 이야기를 만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그가 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참 익숙한 이야기이다. 물론 교회를 좀 다닌 사람들에게는. 거기에는 참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믿음, 순종, 축복 같은 것들이다. 맞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그럼에도 약속을 붙드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늙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젊은 이삭과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멋진 결말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득 아브라함도 인간인데, 한 아버지인데, 연약한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겨우 가족다운 가족은 만들었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다가, 이제 겨우 아들을 얻었다. 근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한다. 하나님도 안다. 그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내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거신다. 굉장히 무심하게, 그리고 어떤 항의도 못하게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나도 이삭이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더 이상 말대꾸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아브라함에게는 더 이상의 퇴로가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말에 따르던가 아님은 부정하고 돌아서는 것 밖에 없다.
참 힘든 일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쩌면 겪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앞에서 감히 제가 그 마음을 좀 알 것 같은데요 하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쉽게 당신 참 대단하네요라고 칭찬할 수 없다. 뭐든 어쭙잖아 보인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는 하나님을 이해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게 인간이니까.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고통 속에서, 불안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면,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고통도 불안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 속에서 산다.
그 속에서 한 가지 빛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알려준다. 내가 겪는 고난과 아픔의 원인도 설명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평안을 맛본다. 그런데 그런 줄 알았던 신앙생활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 온다. 어느 새 내 앞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진다. 고난과 고통이 다시 고개를 든다. 미래가 불안해진다.. 실패를 경험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진다.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지요?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줬다 뺐는 분이니까. 이런 치사한 분이 어디 있나 하고 욕 한번 시원하게 할 법도 하다. 그런데 그런 장면은 없고, 성경은 아브라함의 행동으로만 가득 차 있다. 일찍 일어나서 나무를 챙기고 종들과 함께 이동하고, 제사를 준비하고, 이삭을 묶어 바치는....
그의 마음과 말이 사라져 버렸다. 꼭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이 나는데, 그는 그런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무심히 이삭을 향해 칼을 든다.
억울한 일, 살면서 고통스러운 일 얼마나 많은가. 이해할 수 없는 일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주님 원망하지 않기가 쉬운 일인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제게? 하는 마음이 마음에 가득하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하는가?
삶에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예정론을 배운다. 어떤 사람은 버려두고 어떤 사람은 택하셨다는 말을 들으며 어떤 이들을 거품을 물고 항의한다. 그럼 죄인인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인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화를 낸다.
에베소서 1장의 선택했다는 말은 화를 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창세전부터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뜻이지,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열받기를 바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화부터 내고 마음을 닫아 버린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는지, 그 답은 잘 모르겠다. 물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마음의 폭풍까지도 부정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련의 무게가 너무 커 보인다.
그래서 다만, 나에게도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감사하고 찬양할 믿음, 성령께서 내 안에 착한 일을 하실 것을 바라며 주님을 부정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내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작은 믿음인지, 믿음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건지 주님이 아시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