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것
사람들은 잊었다. 자신들의 죄를 잊고, 그 벌을 잊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자신들의 모습을 잊어버렸다. 심판을 경고하셨음에도, 당장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감각해졌다. 호세아뿐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했음에도, 미뤄지는 심판에 무감각해지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친다. 형벌의 날이 이르렀다고, 보응의 날이 왔다고 외치고 있다. 하나님을 뜻을 깨달은 선지자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잊는 백성들에게는 형벌과 보응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9장의 배경은 명절, 즉 여호와의 절기이다. 9장 1절에 이방 사람들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말씀하신다.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다고 그들의 죄를 밝히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절기에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형벌과 보응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런데도 사람들은 심판을 잊고 살아간다. 당장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 아니니까. 우리도 그렇다. 당장 내일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내 욕심 채우며 산다. 하나님의 절기에 욕심을 채운 백성들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속으로는 내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헌신하면, 자식이라도 잘 돼야 한다는 말에 무서움을 느낀다. 바꿔 말하면 나는 어쩌다 보니 세상적으로 성공 못하는 길에 서 있지만, 내가 희생했으니 내 자식은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 주셔야 한다고 하나님께 강요하는데, 그러면서도, 그게 믿음이고 바른 길인 것처럼 말한다.
주님 다시 오심을 잊고 산다. 그래서는 안된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세상의 성공은 헛된 것임을 알았다면, 내 욕심이나 자식의 성공이 우선순위에 올 수 없는 일이다. 주님의 완전한 심판이 미뤄지고 있다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일은 아닌데, 우리는 너무도 용감하게 심판이 없는 것인 양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2. 어리석은 선지자
그런데 백성 속에 선지자가 있다.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된 자가 미쳤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선지자들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깨어 있어야 할 선지자가 오히려 타락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말을 백성들이 선지자를 공격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너희는 말하기를 "이 예언자는 어리석은 자요, 영감을 받은 이 자는 미친 자다"라고 번역하였다.
백성들이 호세아 선지자를 미친 사람으로 공격하면서 그가 전하는 말씀을 배척한다. 예레미야가 바른 말씀을 전하고도 웅덩이에 갇혔던 것처럼 그 역시도 백성들에게 거부당하는 모습이다. 여호와를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땅에 오셨지만, 결국 백성들에게 거부당하신 것처럼, 복음을 들고 선 자들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8절과 연결할 때,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사실 8절의 말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몇몇 한글 번역 성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개역개정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바른 성경
선지자는 나의 하나님과 더불어 에브라임의 파수꾼이나, 새 잡는 자의 그물이 그의 모든 길에 있고, 그의 하나님의 집에 미움이 있다.
새번역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예언자가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았다. 하나님이 계신 집에서마저, 너희는 예언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개역개정에서는 선지자가 그물과 연결되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선지자는 파수꾼과 연결된다. 선지자는 파수꾼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그의 앞에 그물이 있고, 덫이 있고, 원한과 미움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 있는 7절의 말씀이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고, 성전에서마저 그러하다는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적당한 길을 타협하려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데, 자칫, 하나님은 없고,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오히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작가가 쓴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내면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을 거절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데로 살아가는 나를 내버려 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늘 바른 일일까? 사람들의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대중들의 시선이 하나님의 눈길은 아닐 텐데, 너무 자주 성경보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이게 지혜로운 거야라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위해 미움을 감내할 용기, 하나님 때문에 친구를 잃을 각오. 주님 때문이라면 명성과 인기를 포기할 그런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미움 속에서 담대하게 섰던 선지자들이 그립다.
호세아가 그러지 않았을까? 고멜과 결혼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했을까. 그리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얼마나 매몰차게 거절했을까? 죄악을 지적하는 말씀에 원한으로 대꾸하는 백성들이 그물과 같은 덫들을 그의 길 앞에 놓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 길에 서 있는 호세아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