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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독사의 자식들아"

세례 요한 두 번째... 

마태복음 3장 7절... 

요한에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나아온다. 그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신학적인 배경과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는 종교 기득권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유대 사회에서는 그들은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았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은 말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건 말할 수 없는 욕설이다. 창세기 3장의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이 등장하지 않는가? 즉, 그들은 그 사탄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할 말이 없는 말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욕하는 사탄하고 동일하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유는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섬긴다 하면서 열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 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듯, 그들 역시도 성경도 알고 제사도 알지만 정작 하나님을 배반하고 합당한 열매을 맺지 못하는 삶, 즉 구원이 없는 삶을 살면서, 도리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압제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면 이건 심각하다는 일이다. 싸우자는 말로 들리고 모욕적인 언사임에는 분명하다. 그것도 모두가 다 두려워하는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지 않는가? 그들과 대항한다는 것은 종교가 지배하는 유대사회에서의 추방이다. 예수님께 고침 받았던 시각 장애인의 부모가 이들이 두려워서, 정확하게는 출교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바른 말을 못하고 숨지 않는가? 출교, 곧 유대 사회로의 추방은 곧 살아갈 방도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과 맞서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치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하고 있다. 마치 현실에서의 나의 삶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눈치, 특히나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설교의 수위를 조절한다. 혹 그들에게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교인들의 마음이 다칠까 전전긍긍한다. 어떤 교인들은 반대로 자신을 지적하는 듯한 설교를 참지 못하고, 욱하고 화를 내며 목사와 설교를 비난한다. 제대로 된 메시지가 점점 실종되고, 특히나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인기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책망하고 바르게 한다 했는데, 교회에 바른 책망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정신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참 부러운 건, 요한이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용기이다. 요한이라고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건데,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시각으로 그들을 향해 일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그렇다면 그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뒤의 본문을 읽어보면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독사의 자식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들의 존경하지 않고 심지어 저항하고 때려 죽여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 회개하는 삶,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을 죽이고자 함이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믿음과 회개로의 삶으로 이끌고 싶은 것이다. 나는 감히 그것이 세례 요한의 본심이라 짐작해 본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고 하나님은 그가 돌아오기를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마음을 아는지는 분명한 길이 있다. 말씀과 기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 우리가 같이 드리는 예배로 우리는 그분을 섬기며 그분이 마음을 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 길에 초대를 받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용기를 내어보자. 인간적인 두려움, 물론 있다. 그 당시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처럼 지금 우리가 국회의원이나 큰 회사의 회장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두려운 마음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수록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 복음 들고 선 사자 같은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