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 첫 번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마태복음 3장 3절)
그의 역할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났다(누가복음 1장 36절). 경건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며, 어려서부터 '빈 들'에 머물렀다(눅 1:80). 그러나 그것 말고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떻게 소명을 받았는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에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다. 사람들이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메시지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을 변화로 이끌고 있다. 그의 모습은 선지자, 엘리야를 떠올리게 한다. 낙타의 털 옷, 거친 털로 만든 그 옷은 그가 보통의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사실 이 옷은 세례주기에도 적합한 복장이기도 하다). 허리에 가죽 띠, 먹는 것이라고는 메뚜기와 야생 꿀... 그의 존재는 뭔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희망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박한 진노이고 심판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는 가혹하다. 독사의 자식들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는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 자신들의 길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 주장하는 그들을 향해 돌직구를 날린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 말은 곧 그들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누구길래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느냐고, 우리가 조상들로 받은 가르침을 이렇게나 잘 지키고 있는데, 당신이 뭔데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고 물을 수 밖에 없다(요한복음 1장 21절)
그 대답으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지만,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역할, 즉 소명이 자신을 설명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요한복음에는 그가 자신을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말한다. 그는 그를 보낸 목적을 알았고, 사명과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이 부럽다. 자신 있게 나의 소명이 이것이고 이것이 내 정체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우리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 역시도 그렇지 않음을 아는데 말이다. 그가 선포한데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길을 우리가 예비하고 혹은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부끄러움만 한 가득 가지고 선다. 오늘도 부끄러움을 십자가에 앞에 조용히 놓아둔다. 광야에 선 그가 참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