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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천국과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의 처음과 마지막 복…

천국… !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유독 마태만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이다. 마태는 그의 글을 읽을 사람들을 배려했다. 유대인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불러 신성모독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불렀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없다. 옛 소련의 우주비행사가 대기권에 올라가 천국이 없다 했는데 당연한 말이다. 원래 천국이라는 말은 하늘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마음이 가난 자들에게 복이 선언되고 그들이 받는 복은 하늘(하나님) 나라이다. 하늘나라가 장소가 아니기에 어느 곳에 들어간다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이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즉 그분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분이 다스림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분의 통치, 왕권, 나라 가슴 뛰는 그 나라 속으로 그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 그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이 다스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분이 예수님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꿈꾸었던 메시야 국가는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다윗과 같이 정치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이제 그 메시아가 자기들 눈앞에 서 있다는 선포를 예수님께서 하신다. 너희들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가 여기와 있다. 그 메시아가 바로 "나", 예수다라는 선포이고 선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들이 꿈꾸던 장군이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적인 왕도 아니고, 한낱 갈릴리 목수의 아들이 그런 말씀을 한다. 그것도 가장 낮은그 당시의 백성들에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이 분이 메시야인지... 약속된 그분인지... 로마로부터의 승리와 독립과 해방, 유대 귀족들의 착취와 압제 속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선포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우리야 '그 이야기'(복음)을 아니까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온전히 믿기란 어려웠다는 것을 짐작해 보게 된다. 

그렇지만 주님은 산상수훈 내내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와 그 새로운 법을 말씀하신다. 즉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규칙이다. 이제 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다는 선포이고 팔복은 그 법의 '전문'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들이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으라"는 예수님의 요청이다. 

천국 혹은 천당을 그리면서 부와 명예와 쾌락과 이런 것이 자극된다면, 팔복과는 상관이 없다. 즉 믿음이 넗은 아파트와 좋은 차와 시간적 여유나 취미 생활, 아니면 지위나 사람에게서 받는 존경으로 치환된다면 그것 역사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 교회 생활, 믿음 생활의 목적으로 이런 것들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다. 그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 다스림 속으로 한 발짝 앞으로 들어가는 사람,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 손잡고 그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 즉 성도이다. 

p.s 아이들이 좋아하던 "Into the Unkown"이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난다. 잘 모르는 세계로 들어갈 때는 두렵다. 믿음의 여정도 그렇다. 그래도 앞에 가신 예수님 바라보고 사는 것이 믿음이고 인생이다. 예수 믿는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다. 그건 동행이다.